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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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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난 3일 오후 미국 가는 척 중남미를 가는 항공권을 소개한 이후 개점휴업입니다. 이용권 구입은 물론 항공권을 검색하는 분도 확연히 줄었습니다. 이런 헌정의 시간(천관율 시사인 기자의 글 참고)에 항공권을 소개할 수도 없고, 또 소개한다고 보는 분도 별로 없을 겁니다. 당분간, 구속이든 탄핵이든 윤석열이 내려올 때 까지는 항공권을 소개하는 글은 쓰지 않겠습니다. 물론, 메타온메타는 계속 돌아갑니다. 저도 항공권은 계속 찾고 있습니다. 글로 소개하지만 않을 뿐입니다.

대신, 오늘은 제 생각을 풀어보려 합니다.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슈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는데요.(슈카의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네, 저도 회사를 운영하고 서비스를 하는 입장에서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더 큰 이유는 제가 세상에 그리 영향력이 있는 인물도 못 되고 또 저보다 훨씬 뛰어난 식견을 가진 분들이 더 큰 청중을 대상으로 충분히 잘 정리해서 이야기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전문 분야도 아닌데, 또한 제가 그 많은 사안들에 대해 이해하고 분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힘을 보태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한 분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아니 한 분이라도 집회에 참가해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1. 저는 과기대(90년에 대학원 과정만 있던 KAIST와 합쳐진) 86학번입니다. 전두환이 만든 대학의 1기입니다. 선배도 없고 교수님들께서 신입생 환영회를 해주던 학교였습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운동권 학생도 없었고 독재라는 인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회관에 붙은 광주의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그 처참한 사진들을 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렀고, 87년 여름 전방에 갔습니다. 당시의 모든 남자 대학생은 대학 1학년과 2학년에 일주일씩 군부대에 입소했습니다. GOP도 경험(?)하고 정신 교육도 받고 뭐 그런 거였죠. 물론, 맞기도 했습니다. 특히, 6월 항쟁이 한참이던 때라 더 맞았죠. 입소 훈련이 끝나고 서울 어딘가에 내려지고 보니 노태우의 6.29 선언이 있었더군요. 우리는 그 중요한 시간에 현장에 없었다는 점을 한편으로는 아쉬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87년 여름을 보냈습니다.

2. 87년 겨울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의 삼파전이었죠. 당연히 누구나(?) 김대중이나 김영삼 중 한 분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6월 항쟁으로 만들어낸 대통령 선거였으니까요. 6월을 지나며 우리나라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건 오산이었습니다. 하긴, 80년 서울의 봄도 그랬습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쓰러진 뒤, 유신이 끝났고 드디어 독재가 끝났다는 생각을 다들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도 아니었죠. 5.18과 군부독재가 이어졌고 다시 87년이 되었던 거죠. 민주주의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건가 봅니다. 87년에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까요. 김재섭에게 윤상현이 한 말은 그 뿌리가 정말 깊습니다.

3. 대통령 선거가 있던 주간에는 기말고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뉴스를 통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는 모두 분개했습니다. 무작정 이건 부정선거라고 믿었죠. 다음날 대전역 앞 대로에서 데모(당시에는 집회나 시위라는 말 보다는 데모라는 말을 더 많이 썼습니다)가 있었습니다. 참가자 대부분은 과기대생이었지만,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과기대생이 아니라는 거죠.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요)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지역의 별다른 데모 소식을 접하지 못했는데요. 다른 대학들은 다들들 방학을 한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불의에 맞서는 주인공이 된 양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3. 하지만, 생전 처음 데모를 하는 우리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최루탄이 터지자 마자 혼비백산하고 다들 도망갔거든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옆에는 OO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조금 지나 다시 데모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시 얼굴을 모르는 주동자가 앞에서 구호를 외치면 뒤에서 따라서 외치며 골목골목을 돌았습니다. 계속해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눈물 콧물을 흘렸지만 그리 두려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전경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원래 데모가 이런 건가 보다 싶었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이만 해산한다며, 주동자를 비롯해 앞에서 이끌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론가 갔습니다. OO이와 나는 이제 뭘 할까 이야기 하고 있었죠. 시내에 나온 김에 좀 더 놀다 가자고. 막걸리를 마시러 갈까 당구를 치러 갈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거칠게 제 목덜미를 잡더군요. 돌아보니 이미 늦었습니다. 어느새 전경들이 쫙 깔렸거든요. 목덜미를 잡은 손을 뿌리치고 달아난다 한들 탈출에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OO이와 함께 그렇게 잡혀 갔습니다.

4. 경찰서에 도착해 계단을 올라갈 때, 좌우로 도열한 전경들이 군화발로 패더군요. 그렇게 유치장에 수감된 후 단무지 몇 조각과 함께 조금 삭은 듯한 콩밥도 먹었고, 한 사람씩 불려가 취조를 받았습니다. 저를 취조했던 형사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습니다. 사실 저는 숨길 것도 없었고 알고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별로 취조할 게 없었던 거죠. 하지만, 꽤 긴 시간을 취조 받았습니다. 취조 과정에서도 계속 맞았습니다. 경찰서는 일단 때리는 것이 기본인가 봅니다. 결국, 그 형사는 자기 마음대로 조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발 새발 그 형사가 직접 쓴 조서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맞춤법도 너무 많이 틀려서 읽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그 형사는 자기가 쓴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 했습니다. 내가 쓴 조서가 아니니 지장을 찍지 않으려 했지만, 계속되는 폭행에 결국 지장을 찍었습니다. 내가 찍은 지장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볼 만한 내용은 없어 보였도 또 너무 엉망으로 쓰여 있어서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그냥 찍자, 뭐 어떻게 되겠지 싶었습니다.

5.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날 저녁, 학생처장이 우리를 데리러 왔습니다. 총 17명이 잡혀왔는데 과기대생이 9명이었고, 우리 9명은 그렇게 풀려났습니다. 물론, 우리가 멍청하고 순진한 단순 가담자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과기대라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전두환의 업적 중 하나인데, 과기대생마저 데모를 했다는 점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겠죠. 마음 한편으로는 무언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대신 남은 8명이 더 크게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공권력이 더 나쁜 거였지만, 제 마음에는 내가 너무 비겁하게 부당한 특별 대우를 받은 것 같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깜깜한 밤에 봉고차를 타고 학교로 왔더니 학교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방에 올라가 간단히 짐을 챙기고 타고 왔던 봉고차를 다시 타고 대전역으로 갔습니다. 다른 학우들처럼 집으로 보내 버린 거죠. 연기된 기말 고사는 1월에 다시 봤습니다. 그렇게 87년이 갔습니다.

6. 당시의 학생 운동은 NL 계열과 PD 계열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과기대 친구 중에도 타 대학 운동권과 교류하며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기에 그런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NL과 PD의 차이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했고(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왜 그렇게 분열되어 싸워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했고) 또 그들의 주장이 제게는 앞뒤가 맞지 않게 들렸습니다. 마치 이게 옳은 거니까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 생활을 이어 갔지만, 제게는 막연한 빚이 남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제 생각은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했고 또 그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변화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7. 십여년 전 OO이는 감옥에 갔습니다. 87년 겨울 같이 잡혀갔던 그 OO이입니다. 학생 운동이나 노조 활동 뭐 그런 것 때문은 아닙니다. 대기업에 다니던 OO이는 같은 부서의 상사들과 회사를 나와 기술 벤처 같은 것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해외로 기술을 유출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기업의 신고로 국정원이 개입했고, 얼마간을 복역하고 출소했습니다. 출소 후 OO이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OO이 출소 며칠 후 만나서 술을 함께 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후 OO이와의 연락은 끊겼습니다. 지금은 동기들 중 아무도 연락이 안됩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OO이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저는 또 한 번 일개 소시민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부정한 힘이 작용한 것이라 느꼈습니다.

8. 얼마 전, 한강의 노벨문학상 선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며칠 후, 집에 있었지만 읽지 않았던 '소년이 온다'를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펑펑 울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진 탓일 겁니다. 아직 읽지 않은 분은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9. 슈카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슈카가 올리는 영상을 거의 다 봅니다. 슈카는 경제 유튜버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시사 유튜버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국내외 이슈를 다룹니다. 정리도 잘하고 전달력도 좋습니다. 3백만명을 훌쩍 넘는 구독자 수가 입증한다고 할 수 있죠. 시사 유튜버에게 국내 정치는 지뢰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입장을 정하지 않는 한 다루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슈카도 국내 정치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다루더라도 교묘하게 줄타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내란 사태는 다루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줄타기에 실패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계엄을 비판하는 입장이었지만, '무난하게 임기 마치고 그만 두셨으면 좋겠고'란 말이 구설에 올랐습니다. 이걸 모 기자가 기사로 썼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일만 한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그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동안 슈카가 올린 영상을 계속 보았다면, 그가 대부분의 사회 이유에 대해 얼마나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실 겁니다. 다만, 국내 정치를 다룰 때 너무 줄타기에만 신경 쓰다 보니 양쪽 모두 불만인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번에도 줄타기를 하던 와중에 순간적인 실수를 했다고 봅니다.

10. 제가 생각하는 슈카의 잘못은 바로 줄타기입니다. 이번 내란 사태는 줄타기를 할 수 없는 이슈였습니다.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지언정 다루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겁니다. 다룬다면 줄타기를 하면 안되는 이슈였고요. 어쨌든 슈카는 내란 사태를 다뤘고 줄타기에 실패했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는 그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나락으로 떨어진 슈카가 잘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약점은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또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인사들이 한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져 흑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그 때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해지는 개인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1. 투표권이 생긴 이후로 항상 민정당과 그 후신의 반대편 당에 투표했습니다. 제 투표 기준은 단지 악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입니다. 거악을 척결하기 전에는 다른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설사 제가 투표해야 하는 당이 추진하는 정책이나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악은 막아야 된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거악이 척결된 다음에야 진보와 보수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2.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진보는 ‘변화와 혁신’을 통한 사회적 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수는 ‘전통과 안정’을 통한 사회적 유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저는 진보이기도 하고 보수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마찬가지일겁니다. 이는 민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당 내의 상당수 의원들은 보수로 분류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하지만, 민정당과 그 후신들은 보수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전통과 안정도 사회적 유지도 관심 없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한 가치는 자신의 이익 뿐입니다.

13. 진보 내에서도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변화를 통한 사회적 개선의 지향점도 다를 수 있고 또 그 방법론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각자가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서로 다른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서로 주장하고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단계까지 가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상적인 사회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저 거대한 악의 무리를 척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무리들이 보수라는 탈을 쓰고 세상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는 나와 생각이 달라도 조금의 흠이 보여도 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4. 14(토)일에 여의도에서 뵙겠습니다.